‘不二火’는 한원석 작가의 전시 주제로서 ‘不二門’ 즉 “진리의 근원은 하나이다”라는 불교의 사상을 차용해서 만들어졌다. 작품의 형태는 짙은 검정 지관이 겹겹이 얽혀서 그 안의 강렬한 붉은 불빛을 감싸고 있는 방식으로 4미터의 거대한 규모로 구축되어 있다. 지관으로부터 나오는 시율의 바흐 푸가 변주곡은 미세한 심박음과 섞여 공간 전체를 울리며 흡사 건물 전체를 하나의 울림통으로 만들어낸다.
한원석 작가의 많은 작품들에서 주된 소재는 ‘소리’와 ‘빛’으로, 이는 비물질적인 요소로서 작품의 형식과 의미의 근간을 이룬다. 작가에게 소리와 빛은 작품에서 다루는 ‘대상들(Objects)’에 주체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다. 다시 말해, 기계적인 수단이나 도구로 기능하는 사물들을 갖고선 자신의 방식대로 작품화하여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한다.
예를 들어, ‘환생(2006)’의 작품화된 첨성대는 스스로 빛을 내고, ‘형연(2008)’에서 3천여 개의 스피커로 만들어진 성덕대왕 신종은 스스로 소리를 내는 종이 된다.
필자는 2003년, 경주에 있는 실제 성덕대왕 신종의 마지막 타종과 그 소리를 현장에서 보고 들은 적이 있다. 종을 만들 당시 멀리바닷가까지 들리도록 제작했다고 하니 그 소리가 지극히 클 테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종을 치는 이는 그 소리를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종소리에 대한 기억을 약간 기술하자면, 울림이 묵직하면서도 그 소리는 맑았다. 신호와 함께 타종을 하면 소리가 잠시 멈추었다가 서서히 울리면서 몸을 스치듯 지나며 퍼져나갔다. 종을 치는 이, 소리를 듣는 이를 포함하여 주변의 모든 사물들에게 진동을 옆으로 뒤로 전달하면서 그렇게 저 멀리 밖으로 소리를 퍼뜨리는 것이다.
원래의 종은 왕의 위엄을 위해 제작되고 쓰였다지만, 한원석은 그 위대한 예술품의 의미를 소리의 차원을 빌려 달리 표현했다. 종소리는 그 자체로 바다까지, 우주까지 퍼지는 것이 아니다. 타종과 함께 주변의 모든 사물들, 버려진 모든 것조차도 소리의 파장과 공명하면서 소리를 소리로 들리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소리에 자신의 몸을 섞음으로써 소리의 주체가 된다. 사실, 이러한 장(field)에서는 주체와 객체(대상)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이번 작품도 그의 작품의 주된 소재인 소리,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난 해, 이 곳 알베르에서 개최했던 <無心(무심)_The Silhouette>에는 소위 ‘검정종’을 전시했었다. 미술평론가 안현정은 전시장에 설치된 종을 보고 칠흙같은 ‘검음(玄)’이 빛(조명)과 함께 ‘밝음(炫)’이 되었다
고 표현했다. ‘흑(어둠)’과 ‘빛(밝음)’을 의미하는 동음이어 ‘현’은 언어유희가 아니라, 실제 동양의 뿌리깊은 사상을 반영한다.
검을 ‘현’에는 ‘하늘’이나 ‘그윽한’의 의미가 있다. 여기서 하늘은 ‘우주’를 말하며, 우주는 경계 없는 무한대로서 그 안에서는 둘이라는 구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전시의 ‘불이화’는 ‘밝음(火)’과 ‘검음(玄)‘이 하나로 합쳐진 빛날 ‘현(炫)’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지난 번 ‘종’에서 시도했던 빛과 어둠의 ‘하나됨’의 관계를 이번에는 아예 하나로서 묶어버린 형국이다.
우리는 여기서 ‘검정’이 빛의 근원이자 모든 색의 총합이고, 모든 빛은 그 어둠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감지하게 된다. 이에 대해 일반적인 언어로는 “둘이라서 둘이 아니다”라고 한다거나 “둘이기 때문에 하나일 수 있다”라는 등의 모순되거나 역설적인 방식 말고 달리 표현하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작품 또한 물질로 구체화된 이유로 인하여 작품내의 요소들 각각의 경계들도 존재할 수밖에 없긴 하다. 경계나 구분을 없앨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허물어뜨리거나 뒤섞어야 할 이유도 없다.
작가가 소리를 진지하게 사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작가 ‘한원석’은 소리의 원리를 갖고 만물이 서로 관계 짓는 이러한 근원의 방식을 드러내기 위해 음악가 시율‘’과 협업하였다. 검정지관에서 나오는 음악은 작품의 주제에 맞춰 음악가 시율이 바흐의 미완성 푸가 중 한곡인 Art Of Fugue BWV 1080 ‘Contrapunctus 1’를 변주한 곡이다. 현대식 악기들로 변주된 ‘악’에 심연의 소리이자 진동인 심박음‘’이 함께 울린다.
앞. 서 언급했듯이 소리는 하나의 장‘(field에서)’ 모든 것을 전부 수용한다. 달리 말하면 모든 것에 의해서 하나의 소리가 된다. 알베르에 매달린 심장은 건물을 몸 신체() 삼아 소리를 내게 되는데, 그 순간 공간에 있는 모든 청중과 사물, 건물의 오래된 벽,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우는 대기와 먼지, 결국에는 붉은 빛 조차도 그 음에 공명하며 소리를 발생시키는 파동의 주체가 된다. 하나의 소리는 그렇게 가청범위의 모든 것을 포함함으로써만 온전해진다. 한원석 작가는 소리의 원리에 내재된 만물의 주체가 맺는 관계성을 예술의 방식에서 표현해내고, 음악가 시율은 이를 이어받아 알베르를 울리는 하나의 푸가를 만들어내었다.
이번 작품에 사용된 검정지관들은 앞서 보타닉하우스에 전시했던 파파게노‘:Re dream’ 에서 소리나는 나무로 기능했던 형형색색의 지관들이다. 그때의 작품은 유리천장에 딱 맞게 끼워진 색기둥‘-나무 와 ’실내정원에 걸맞는 새소리‘-음악 으로’ 구성된 장소특정적인 형식의 작품이다. 작가는 이러한 형식을 ‘즉흥성’에 의한 것이라 표현했다. “예술에서 즉흥성은 아주 중요하고, 예술가는 장소에 맞춰서 작품을 변형하고 설치할 수 있어야 한다.”(작가인터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그에게 예술은 논리적인 계획보다는 직관적인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공간에 적합한 방식으로 있기 위해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즉흥적으로 몸을 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으로 완결되는 순간은 섬광처럼 즉흥적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을 향했던 수많은 시간들은 얼마나 지난했을까. 게다가 애써 벌어놓았던 파파게노를 순식간에 해체할 때의 그 심정은 또한 어떠했을까. 그 허무의 심정을 만회라도 하듯이 작가의 즉흥성은 알베르의 공간에서도 여실히 발휘되었다. 그렇게 형형색색들의 지관들을 해체하는 순간부터 공간에 설치되어 이정도면 되었다“”고 하는 순간까지 여기에, 음악가 시율과 작품의 소리음을 끊임없이 조율하는 모든 시간들까지 모여 여기서만 온전한 의미를 얻게 된 하나의 작품으로 완결되었다.
각자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말한다. 이해하고 말하기는 쉽지만 실행하기엔 어렵다. 예술은 자신의 모습을 허물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다른 것을 해하거나 변형시키지도 않으면서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데 탁월한 방식이다. “아름답다는 것의 의미가 나 답다는 거래.” 작가가 한말이다. 어떠한 기준을 따르지 않고, 그렇다고 어떠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면서 즉흥적으로 매 순간을 살아가는 삶이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의미가 있는 삶이 아닐까. 한원석 작가는 사유의 범위에서 의미를 추구하거나 부여하는 것보다 몸소 살아가면서 삶의 의미가 생겨나도록 하는 방식을 택했고, 이는 그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술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