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irth
환생
’ 쓰레기 미술, 문명을 가로지르는 리얼리티'
고충환 _ 평론가, 2006
영국의 작가 토니 크랙은 템즈 강변의 플라스틱 조각, 병, 주사위, 금속조각, 고무 등의 각종 생활쓰레기들을 소재로 차용하여 이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그리고 루체른 출신 작가 우르슐라 스탈드는 해변이나 강변에서 발견 한 각종 자연 혹은 생활 오브제들을 채집해서 이를 고고학 적인 발굴 개념과 함께 박물관 식의 디스플레이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세자르가 폐차더미를 이용한 조형작업으로써 압축 조각을 제안하는가 하면, 팝아트 작가 라우젠버그는 때에 찌든 자신의 침구(침대와 침구) 를 재구성한 설치작업으로써 196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인간에 대한 시니컬한 풍자로 악명 높은 에드워드 키엔홀츠는 세계 각처로부터 채집한 온갖 쓰레기들로써 문명에 대한 인간의 신뢰를 공격하기에 주저함이 없다. 한편, 피에르 레스타니의 논리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신 사실주의는 각종 공산품 쓰레기들로부터 고도로 문명화된 시대를 관통하는 리얼리티를 본다. 일종의 쓰레기 미술에 맞닿아 있는 이 일련의 작업들에게서는 이질감보다는 오히려 친근함이 느껴지고, 현 저하게 모호해진 예술과 삶의 경계가 느껴진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각종 생활 쓰레기라는 재료적인 요인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현대미술에 있어서 이들 재료는 자기 외부로부터 부여된 의미를 수행하는 종속적인 존재(일상적이고 기능적인 존재)로부터 벗어나서, 스스로 의미를 생산하는 자족적인 존재(심미적이고 미학적인 존재)를 획득하기에 이른 것 같다. 담배꽁초 작업. 한원석은 기능을 상실한 것들, 버려진 것들, 폐기 처분된 것들, 산업과 문명의 쓰레기들에 주목한다
그들 생활 쓰레기들이야말로 동시대를 관통하는 리얼리티라고 보며, 동시대를 대변해주는 아이콘이라고 본다. 그리고 가장 작고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생활 쓰레기인 담배꽁초를 채집한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수의 담배꽁초들을 하나의 화면 속에다가 집합시키는 식으로 그림을 만들고 구축한다. 그렇게 마치 모자이크처럼 재구성된 꽃이 화려하게 피어난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그의 그림에 있어서는 전면만큼이나 그림의 이면이 중요하다는 거다. 화려한 꽃 그림의 뒤쪽을 보면 피우다 만 담배꽁초들이 그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꽃은 흔히 순간의 아름다움 때문에 인생무상을 상징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악을 상징하기조차도 한다. 이 아름다움은 현실이 결여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주지시키기 때문이다. (현실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그래서인지 꽃 그림과 담배꽁초를 대비시킨 이 일련의 그림들이 미(美)와 추(醜), 선과 악의 대비처럼 읽힌다. 더 나아가 추는 미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악은 선의 분신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이는 서로 대척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상호 내포적인 개념임을 주지시킨다. 이로써 작가의 담배꽁초 그림은 단순한 환경오염에 대한 계몽적 메시지나 도덕적인 메시지를 넘어서 고 있다. 그리고 악은 선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신성한 일부로 여기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 에 그 맥이 닿아 있는 존재론적 자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폐(廢)헤드라이트 작업. 한원석은 신사실주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각종 공산품 쓰레기나 산업쓰레기들이야 말로 고도로 문명화된 동시대의 리얼리티이며, 아이콘이라 본다. 이는 리얼리티를 결정적이고 닫힌 개념으로보다는 시대상황에 따라 언제든 재정의 될 수 있는 비결정적이고 열려진 개념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공산품 쓰레기들 중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며,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헤드라이트에 주목한다. 알다시피 헤드라이트는 자동차의 부품이다. 작가가 이를 수거하기 위해 뒤지고 다닌 곳은 다름아닌 폐차장 즉 자동차의 무덤이다.
폐차장은 자동차가 그 생을 마감하는 무덤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생이 시작되는 산실이기도 하다. 즉 자동차라는 고유의 기능을 상실한 채 버려짐으로써 오히려 오브제로서의 재생의 삶을 사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상적인 맥락으로부터 미학적인 맥락으로, 정상 적인 맥락으로부터 비정상적인 맥락으로 그 존재방식이 옮겨진 것이다.
알고 보면, 세자르에 의해 한갓 자동차가 조각으로 재생되는 것이나, 작가에 의해 폐 헤드라이트가 조형물로 재생되는 것이나 바로 이런 탈 맥락화(일상적인 맥락으로부터의 일탈과정)와 제 맥락화( 미학적인 과정으로의 편입과정)의 프로세스와의 연관성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듯 수거한 폐 헤드라이트들을 소재로 해서, 작가는 실물크기 그대로의 첨성대를 재현한다. 즉, 국보 31호인 첨성대의 햇수에 해당하는 1374개의 폐 헤드라이트로써 이를 재구성해낸 것이다.
이 때 조형물의 내구성을 기하기 위해 내부에다가 철골 구조물을 설치한다거나, 벽돌을 쌓듯 헤드라이트를 쌓아 올리는 식의 공법이 작가의 작업을 단순한 조형물 이상의 건축공학으로까지 확장시킨다. 더불어 헤드라이트 속에다가 LED를 장착 해서 조명을 밝히는 과정을 통해서는 전기공학(현대미술과 관련해서 라이트아트에 맞닿아 있는)마저 한 요소로서 끌어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으로써 조형개념과 더불어 인접 학문이 연계된 일종의 학제간 연구방식이 실현된 것이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력한 팀 작업(전통적인 작가 개인주의 작업 방식과는 구별되는)의 한 전형을 실현해 보여준다. 여기서 헤드라이트 하나하나는 조형물 전체를 이루는 최소단위, 최소원소, 모나드, 단자에 해당하며, 그 자체 전체와 부분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암시한다. 그리고 특히 밤에 붉을 밝히는 헤드라이트 불빛은 별빛을 암시하며, 이는 그대로 별을 관측한다는 첨성대 자체의 존재의미와도 통하는 것이다. 이때 불빛을 은근하고 부드럽게 조절함으로써 가급적 자연의 빛에 가깝게 연출하며, 심정적으로 별빛과 동일시되도록 연출한다
. 현대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을 상실했으며 흔히 사사로운 꿈과 이상을 투사하거나 시상을 떠올려주던 별빛마저도 그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다. 잿빛 하늘이 단순한 별빛 하늘만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니라, 별빛과 함께 현실에서 일탈할 권리, 꿈꿀 권리마저도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그 상실감은 고향의 상실감, 존재론적 상실감에 다름 아니며, 이 때의 상실된 고향은 단순한 지정학적 장소로서의 고향을 넘어서는 플라톤의 이데아, 칼 융의 원형과 같은 존재론적 근원을 암시한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상기시키는 것에서 예 술의 존재 이론을 찾는다.)
그러니까 한원석의 첨성대 조형물은 현대인이 상실한 자연을 되돌려주고, 별빛을 되돌려 주고, 꿈꿀 권리를 되돌려 준다. 이 폐헤드라이트 조형물은 일종의 별들의 집인 셈이다. 그 이면에서는 재생과 복원의 이념이 작용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이 조형물이 세워진 청계천(청계천 광통교)의 환경복원 이슈와도 통한다고 볼 수 있다.
폐 스피커 작업. 한원석은 곧 있을 일본 전시에서 폐 스피커(약 8만 개)를 이용한 작업을 구상 중이다. 미술관의 내부 공간 전체를 폐 스피커로 뒤덮은 연후에, 관객들로 하여금 거대한 스피커를 연상시키는 인공의 공간 속을 거닐게 하겠다는 거다. 이렇듯 작가의 일련의 작업들은 디스플레이의 방법론 혹은 전시공학과 관련하여 주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이를테면 담배꽁초 작업을 통해선 전면과 이면이 공존하고 대비되는 조형작업을 선보인 바 있으며(흔히 전면만 부각되기 마련인 일반적인 회화의 경우와는 비교되는), 폐 헤드라이트 작업을 통해선 열려진 대기와 연속된 환경 친화적인 조형물을 세우기 식이다(빛은 자기 외부로부터 확장된다). 그리고 폐 스피커 작업을 통해서는 주어진 공간 자체를 조형작업에 일치시키는 식의, 공간 자체를 작업과 동격으로 놓는 식의, 보다 적극적인 공간설치작업의 한 유형을 제안한다. 이들 작업의 이면에선 단순한 조형작업의 경계를 넘어서는 건축공학적인 프로세스가 읽혀진다. 이렇게 공간 가득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일상에서 채록한 각종 일상은 혹은 생활 음이 흘러나와 현실성과 현장성을 강화시켜준다.
한원석은 담배꽁초 작업으로써 냄새를(후각정보), 폐 헤드라이트 작업으로써 빛을(시각 정보), 폐 스피커 작업으로써 소리를(청각정보) 조형의 한 요소로서 끌어들인다. 이로부터 외관상 별개의 감각 기관들이 그 이면에서는 서로 통한다는 공감각에 대한 인식이 엿보인다. 이러한 공감각에 힘입어 작가는 현대미술의, 환경조형물의 어휘를 확정시키고 있는 것이다.
’ 한원석 이야기'
김영호 _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본부장, 2006
남산기슭, 2005년 여름날 오후 한원석을 처음 만났다. 당시 우리들 중 누군가가 그의 독특한 작품에 매료되어 재단으로 그를 초청하였다. 그는 자기 몸집 보다 육중한 ‘악의 꽃’작품을 들고 나타났다. 문제는 그가 계단을 내려오다가 액자를 놓쳐버렸고, 엄청난 담배 내음이 진동을 했다. 담배가 사람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확연히 일깨울만한 내음이었다. 그는 당황했을 법 한데도 ‘괜찮다. 다 괜찮다고’ 했던 기억이 오랫동안 뇌리에 자리했다.
그리곤 그를 잊고 있었는데, 그 다음해인 2006년 청계천미술제를 통해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청계천이 처음으로 물길을 열고, 거기에 걸 맞는 기념비적인 문화행사로 국제적인 규모의 미술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시정부로 부터 떨어졌다. 처음에는 1년도 아니고 겨우 두 서달만에, 그것도 조그마한 실내도 아닌, 청계천에서 국제적 야외미술제는 변수가 너무 많아 부적합하다고 일을 미루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때 한원석을 다시 만나면서 불가능한 일이 현실이 되었다. 그는 당시 중국 북경 ‘따산쯔(大山子)798’ 에서 비영리공간을 운영하고 있었고, 이곳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세계 각지의 많은 작가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일은 어렵지 않다고 나에게 말했다. 당시 나는 미술기반의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룻강아지처럼 겁이 없었고, 동시에 저돌적인 한원석의 의지가 절묘한 만남으로 미술제가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이다. 제 1회 청계미술제 ‘미운오리의 비상’으로 명명된 이 야외미술제는 18명의 국내외 작가가 청계천에 다양한 설치 작품을 설치하는 것으로 화려하게 막을 올렸다. 그러나 후유증도 비례하여 나타났다. 나는 미술제를 통해 10년 정도 감수(減壽)했고, 한원석은 저승을 다녀왔다. 우려했던 7월말 천기(天氣)는 청계천에 억수 같은 비를 쏟아 부었고 순간적으로 불어난 물 때문에 청계천팔석담에 자리했던 작품들이 뜬 눈 앞에서 급물살을 타고 물 속으로 사라졌다. 정말 가관이었던 것은 신현중선생님의 ‘공화국수비대’의 거대한 도롱뇽들이 머리를 틀어 한강으로 헤험치는 장면을 목격할 때였다. 필시 살아있는 도룡뇽이 한강을 향해 유유히 헤엄치는 장면을 본 것이다. 급물살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 더 올바른 판단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으나 몸은 말을 듣지 않고 발만 굴렸다. 더불어 한원석의 널리 알려진 이야기 ‘저승기행기’도 이때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다가 공항에서 서울로 오는 빗길 고속도로에서 죽음을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병원에 누워있지 않고 붕대로 온몸을 휘감은 채 미술제를 준비하기 위해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이 괴팍하여 일반적이지 않은 기이한 젊은 작가를 사랑하기로 작정했다.
사랑이 깊으면 아픔도 큰 법. 그해 가을 결국 풀기 어려운 숙제를 들고 당당하게 나타났다. 문화재단(財團)일이라는 것이 많은 예술가를 만나 그들과 함께 일하고, 서비스를 베푸는 것이 우리의 밥벌이긴 하지만, 법을 어기면서 까지 그들을 사랑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가 들고 온 숙제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피하는 것이 옳다고 느낄만한 불감당 프로젝트가 틀림 없었다. 첨성대를 재해석한 육중한 작품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청계천 광통교 위에 올려 놓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결국 나는 작품을 슬쩍 청계천축제 일환으로 안배하고 허가가 나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 프로젝트는 허가 받기 어렵다는 이유로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채 표류했다. 결자해지(結者解之)! 그날부터 난 한원석과 차안에서 물과 빵을 먹어가며 ‘시설관리공단’ ‘도로관리사업소’ ‘문화재관련기관’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작품의 가치며, 안정성에 관하여 내 자리를 걸고 설득 작업를 해 나갔다. 누구도 반겨하지 않은 일이었고 불가능 하다고 믿었지만 결국 우리의 정성은 통했고 그의 작품은 사상 초유의 청계천설치 걸작품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름하여 ‘청계천에서 별을 따다-환생’전이 세상에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 이후로도 나는 한원석의 작업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의 능력에 폭발적으로 커 나가것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주변에 많은 분들이 그의 독특한 이력이나 특이한 예술가적 행보에 대해 마뜩해 하지 않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들의 편협한 눈들에서 초조함을 읽어 낼 수 있다. 지금 어떤 시대인가? ‘탈장르’ ‘하이브리드’ ‘통섭’이 높은 파도로 넘실거리는 예술의 바다에 누구도 쉽게 파도를 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그 거친 파도 끝자락에서 마치 자기집 수조인양 거친 파도를 즐기며 대양(大洋)을 거침없이 헤엄치는 자. 물 만난 물고기 한원석이 보인다.
보다 큰 가치를 가지고 예술적 작업을 함에 있어 시대의 주류들이 바라는 입맛대로 차려입고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 듯 한다면 필시 그는 큰 재목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혜자가 장자(莊子)에게 말했다.
"내 있는 곳에 큰 나무가 하나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죽나무하고 부르더군요. 그 큰 줄기는 혹투성이어서 먹줄을 칠 수도 없고, 가지는 비비 꼬여서 자를 댈 수조차 없기에, 길가에 서 있지만 목수들이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지금 그대의 말도 크기만 했지 아무 소용되는 게 없어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을거요."
장자가 말했다.
"선생은 삵이나 너구리를 보지 못했나요? 몸을 낮게 움츠리고 엎드려 있다가 돌아다니는 작은 짐승을 노려 이리 뛰고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다가 결국 덫에 걸리거나 그물에 걸리어 죽고 말지요. 그런데 이우라는 큰 소는 그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아 큰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쥐는 잡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그대가 큰 나무가 있음에도 쓸모가 없다고 걱정하는 듯한데, 어째서 그것을 아무 것도 없는 곳, 드넓은 들판에 심어 놓고 하릴없이 그 곁에서 왔다 갔다 하거나 그 아래에서 노닐다가 드러누워 잠을 잔다거나 하지 않는 거요? 그 나무는 도끼에 찍혀 일찍 죽지도 않을 것이요, 어떤 사물도 그것을 해꼬지 하지 않을 것이니, 목수 눈에나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 것이 어째서 괴로움이 된다는 것인가요. "
- 소요유(逍遙遊)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