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동 언덕의 어느 공동주택 주차장을 작업실로 개조해 작업에만 전념하겠다던 한원석이 어느 날 사라졌다. 워낙 도깨비처럼 증발과 출몰을 반복하니 언젠가 나타나면 또 나를 얼마나 놀라게 할까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난 그는 영국 정부로부터 예술가 비자를 받아 런던의 부유하지만 한적한 동네의 주차장을 작업실로 바꿔 그곳에서 작업과 생활을 병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것도 물가가 비싸기로 소문난 런던에서 화장실도 없이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살고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생리 문제나 샤워 같은 것도 주민들이 이용하는 테니스코트의 클럽하우스를 이용한다고 했다. 이처럼 그에게는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비상한 재능이 있다.
그러다 또 어느 날 런던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그가 나를 부산의 원도심으로 초대를 했다. 용두산공원 자락 아래에 펼쳐진 근현대사의 현장인 신창동이었다. 이곳 중구 일대에는 한때 많은 영화관이 즐비했다. 부산에서 성장한 나는 1970년대 명절 연휴에는 대영극장, 국제극장, 동명극장, 제일극장 등을 전전하던 ‘시네마 키드’이기도 했다. 부산진구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나로서는 기껏해야 명절에나 남포동으로 진출할 수 있었지만, 대신초등학교를 다닌 한원석은 더 자주 이 지역을 어슬렁거리던 어린이였을지도 모른다. 나와 그에게 특별한 추억이 있는 이곳이 영화의 도시 부산으로 성장해 나가는 새로운 역사의 중심이 되었다. 한원석은 기억 속 이곳에 ‘빛을 담은 조형물’ 을 세웠다.
과거 부산은행의 본점이었던 지금의 신창동 지점 앞의 주차장에 들어선 <도경>을 구축하기 위해 한원석은 금융(부산은행), 문화(영화의 거리), 행정(도심재생)이란 세 주체의 목적과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구조와 형태는 무엇인지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빛나는 통로’이자 ‘빛이 이르는 길’을 의미하는 <도경>이다.
부산은행 앞에 우뚝 선 건축이자 조형물인 이 작품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단파론이라는 재료로 마감되었다. 점, 선, 면 색 같은 감각적 재료를 철, 플라스틱, 조명 같은 물리적 재료로 치환하였다. 붉은 색조와 짙은 고동색의 매끈한 표면은 부산은행을 품은 작가의 은유를 대변하며 주차장이라는 건축적 기능과 소규모 문화행사를 위한 광장의 역할을 품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직선을 기본으로 하되 사선이 시각적 긴장과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구조적 형상은 추상적이며 기하학적인 형태의 불꽃을 단순화한 불안정한 조각이다. 하지만 전체로 확장된 조각은 서로 기대서서 상호작용하는 덩어리다. 오래된 건물들이 도열하듯 빼곡한 어느 도시의 원도심에서나 볼 수 있는 복잡하고 다소 퇴락한 환경 속에 불꽃처럼 솟아오른 <도경>이 이 지역의 랜드마크는 아니라 할지라도 원도심을 활성화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둘레 77.2미터 높이 23미터에 이르는 이 대형 조각은 하나의 언어로만 읽히지 않는다. 한원석의 삶처럼 건축과 예술의 경계에서 도심 속에서 미를 추구함과 동시에 건축적으로 기능하며 이 지역을 예술의 장소로 만드는데 기여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