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원석의 과거가 어떻든 지간에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는 쾌활한 사람이며 근심걱정 없는 명랑한 분위기를 잘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2003년이었는지 2004년이었는지 798이 처음으로 태동하던 시기쯤의 어느 한 이듬해 한원석은 798에 있던 내 작업실에 나를 만나러 불연듯 찾아왔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는 2002년 동경화랑 (B.T.A.P Beijing Tokyo Art Project)의 798 오프닝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내 기억에 존재하는 그는 일본현대미술방문단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 후 798 한 화랑의 주인이었다. 2005년 내가 한국의 그의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 그는 한 사람의 건축가였고 그때 당시 미술관을 위한 설계를 하고 있었다. 2008년에 들어 다시 자주 북경에 드나드는가 싶더니,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작품을 들고 돌아왔다.

 

이토록 급격한 세계경제변화시대에 이러한 하나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니, 한원석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소비사회에 둘러싸여 시간과 상품의 방식들에 얽매인 사람들을 일깨운다. 그의 작품이 제공하는 일련의 자각들은 그 영역에 있어 큰 차이들을 보이며 이들은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주변과의 관계성에 있다. 소비적 스트레스가 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먼저 해독의 과정을 거치게 하며 계속적으로 작품이 가지는 영역에서의 영향력을 확인하게 하고 마침내는 공간 속에서 진행되는 일종 의 장력, 긴장감을 경험하게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해독과 의미의 결합 능력은 체계 안의 또 다른 창조적 가능성에 다다르게 한다.

 

한원석의 작품에는 정보의 조직구성이 분명하게 눈에 보인다. 작품구성은 상상의 기초가 필요한데 한원석은 이미 건축가로서 활동했을 뿐 아니라, 아니 그는 건축과 예술이라는 두 사이에서 영원히 자유로운 활동가 일지 모르지만, 그의 상상력은 건축상의 기술과 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상상력을 발전시키는데 있어, 그는 상상자체를 하나의 주요한 논리적 채널로 삼고, 재료자체의 기술적인 기능을 배제하면서 이루어지는 요소를 실제적인 성분으로 삼아 작품을 진행시킨다. 이것은 비예술적인 대담함이며, 야망 이자, 매우 독립성이 강한 특성들로 그의 작품은 이러한 요소들 없이 이루어 질 수 없다.

 그의 작품 ‘버려진 후의 환생’, 바로 이 작품이 그러한 요소들에 있어 이미 익숙한 한원석의 자유자재로움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내가 이 종 작품을 보는 시각은 다른 관찰자들과는 좀 다르다. 우선적으로 그것은 매우 아름답다. 작품의 모습은 전통의 한 맥을 잇는 조형성을 지니며, 사람들은 위풍당당한 그 형상에서 소리의 영원성을 느낄 수 있다. 중국인들은 자주 소리의 역사를 형용할 때 이를 테면 ‘역사의 회음-역사의 메아리’라고 한다. 또 다르게는 ‘요량삼일 – 높고 낭랑한 노랫소리가 오랫동안 선회하며 그칠 줄을 모른다’ 이라 하는 관용어가 있다. 사실 중국 인의 소리에 대한 느낌은 한때 정치적 역사 속에서 동요하던 소리들이 이미 완전히 정화 된 듯한 느낌이 있다. 이 부분에 있어 나는 한국전통음악의 리듬을 매우 부러워한다. 한국적 음악방식은 매우 다양한데, 시간, 공간, 자연환경, 남녀노소, 희로애락 모두 음악적인 장단을 표현할 수 있다. 만약 한원석의 생각이 역사를 이어받는 소리를 재현하는 것 이었거나 혹은 역사를 담아낸 예술적인 소리라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용해되고 융합된 매우 자연스럽고 매우 자신감 넘치는 한원석 본인이며 혹은 그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의 종을 다시 보아하니, 땅을 딛고 하늘을 천장 삼아 서있는 모양새가 사랑스럽게 겸손하기도 한 것이 마치 역사상의 큰 인물 같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라는 한 구절이 생각나기도 하면서, 5.18 광주사건, 하얼빈의 안중근, 그리고 당연히 에른스트 헤밍웨이가 생각난다. 그들은 모두 좋은 대인들로, 자신감이 넘치며,  관엄하고 호탕하며 넘치는 에너지를 지닌 씩씩하고 호탕한 남자들이다. 어찌 보면 역사는 남자들이 창조한다. 한원석은 바로 이 같은 남자다.

황 루이 _ 다산즈798 아트디렉터, 2008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_ 버려진 후의 환생'

한원석은 현대미술에서 주목 받는 작가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관람객의 입장과 경험,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던지는 의미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개념미술을 진행하면서 레디 메이드 오브제의 의미적 해체와 변형하는 작업은 사물에 부여된 사회적이고 일반화된 의미의 해체와 재결합 과정으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기도 하고, 단절시키기도 하며, 새롭게 창조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 형연 “泂然”은 버려진 가치들의 효용을 되살리고, 극단적 소비사회의 단편과 범람하는 물질문명 속에서 버려지는 가치의 재구성 작업을 보여준다. 시대상황에 따라 언제든 재 정의 될 수 있는 열린 개념으로서의 쓰레기는 작가만의 통찰력으로 인간과 자연의 환경적 소통, 현재와 과거의 시간적 소통을 시도한다. 쓰레기는 단순히 실재적 대상으로서만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와 의미로 재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시각ㆍ청각적 언어의 새로운 통로를 확장시켜줄 것이다.

 

수거된 3082개의 폐 스피커는 실물의 동양최고의 범종 성덕대왕신종 크기(폭2.3m 높이3.7m)와 소리의 가치를 그대로 재현한다.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내구성을 기하기 위해 철골 구조물을 설치하거나, 스피커를 쌓아 올리는 식의 공법은 작품을 단순한 조형물에서 건축공학으로까지 확장 시킨다. 더불어 LED조명 장착과 각각의 스피커 배선연결 과정은 소리ㆍ전기 공학마저 한 요소로 끌어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조형작업의 경계를 넘어선 인접학문이 연계된 일종의 학제간 연구방식이 작품으로 실현된 것이다. 이렇게 재생된 스피커 하나하나의 소리는 울림을 암시하고, 이는 그대로 청각적 기능을 가진 성덕대왕신종 자체의 존재의미와도 통하게 된다. (성덕대왕 신종은 신라시대에 제작된 당시 세계 최대의 종이다.)

 

이를 통해 폐 스피커는 예술로 승화되고, 외부로부터 부여된 일상적이고 기능적인 존재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의미를 생산하는 심미적이고 미학적인 존재로써의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형연 조형물은 고유의 기능을 상실한 채 버려진 가치에 재생의 삶을 부여함과 동시에 현대인의 일상적 삶에서 공유되었던 가치들의 소중함을 인식하는계기를 마련한다.

황 두 _ 큐레이터, 2008

’형연'

건축을 전공한 한원석은 사라지는 것들, 쓰레기 폐품 등에 관심이 많다.

그의 첫 개인전 <악의 꽃 The Flower of evil>은 담배 꽁초 10만개로 만든 꽃 그림이다.

버려진 담배꽁초가 담배 향기의 예쁜 꽃으로 재생된 것이다. 예쁜 꽃과 쓰레기 담배꽁초의 어울리지 않는 동거는 작가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둔 ‘쓰레기 미술 rubbish art’의 연장선 위에 있다.

 

쓰레기는 근대 이후 서구 문물이 들어오면서부터 생긴 단어다. 불과 100년 전까지 삶은 자연과 너무 조화로워서 쓰레기라는 말이필요 없었다. 집이나 담장은 나무와 돌ㆍ 흙 ㆍ풀로 만들었고, 옷이나 신발도 천연의 것으로 만들어 땔감이나 재로 다시 사용되었다. 하다못해 음식물이나 사람의 분뇨도 개나 돼지, 밭의 거름으로 재생되었다. 버릴게 없는 삶이었고 가치로 가득 찬 세상이었다.

담배도 순수한 건조식물로 만들어 부싯돌로 피워 사용하던 때 꽁초라는 건 나오지 않았다. 화학약품이 스미고 자본의 바퀴로 생산되면서 담배도 5분의 쾌락이라는 효용이 다한 후 버려진다.

그의 제 2회 개인전인 청계천 설치작품 <환생>도 이러한 효용의 가치를 현재로 되살린 작품이다.

1374년 신라시대에 세워졌다는 동양 最古의 천문대인 첨성대를 1년 동안 전국 50여 곳의 폐 차장을 돌며 구한 1374개의 폐 헤드라이트로 재현한 것이다.

 

<형연>역시 그가 줄곧 추구해온 쓰레기미술의 맥락에 있다. ‘맑은 소리가 펴진다’라는 뜻의 <형연>은 3088개의 버려진 스피커가 사용된다.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은 771년에 완성된 국보 제 29호다.

작가는 “내게 에밀레종은 살아 울림이 되는 마음이다”고 말한다. 에밀레종은 “시간이 흐르고 장소가 변해도 종 자체로서 변함이 없듯 우리 마음속에 변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라고 한다.

 

버려진 스피커를 통해 급변하는 시대에 뒤처져 소외받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리고 다시 이 스피커를 재구성해 새로운 소리와 시각적 재미를 이끌어내는 것에서 재생과 재활의 의미를 끄집어 내는 것도 쉽다.

 

전체적으로 종의 외형과 종두는 에밀레종을 닮았지만 종각과 종소리는 에밀레의 그것이 아니다. 경주박물관에 보관된 에밀레종을 고스란이 복제했다면 밋밋하고 해석은 단순했을 것이다. 일상적이지 않은 미니멀한 종각, 종모양에서 종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를 듣는 체험은 작가가 노리는 전복의 미학이다. 과거와 현재, 시간과 장소를 아우른다는 점에서도 작품은 묵직한 외양을 경쾌하게 떨쳐낸다. 

정형탁_ 부산비엔날레 큐레이터, 2008

’Resonance'

형연 泂然

Resonance

Han_Wons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