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숲> 속에서 우리는 헤맨다.

소리의 실체를 상상할 수 없어서 그렇고, 소리를 만들어내는 종이관의 추상성에서도 그렇다. 헤맴의 과정은 예술이 이제껏 가져왔던 고정관념이 혼란스러워서다. 미술이 갖는 이미지의 영역과 음악이 갖는 청각의 요소에서 <소리 숲>은 어느 영역에도 규정되어지는 게 아니어서다. <소리 숲>은 미술도 아니고 음악도 아닌 3의 영역, 혹은 장르의 경계에 있어 보인다.

미술과 음악의 상관관계는 개념과 인식,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만큼 가깝다. 고흐가 색채와 음악의 상응성(correspondence)이 존재하며 색채의 조화를 공부하기 위해 피아노 수업을 받았다거나, 모홀리 나기가 피아노 연주를 통해 색채 전극판이 움직이는 인터페이스를 생각한 건 알려진 이야기들이다. 칸딘스키는 베토벤의 교향곡을 점으로 표현했고 파울 클레는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것’라는 미학을 자신의 추상 작품에 적용하려 했다.

 

미술과 음악의 상관성에서 한원석의 소리설치작품 <소리 숲(Sound Forest)>은 미술의 장르를 확장하는 것일까, 아니면 미술과 음악의 통합을 시도한 것인가.

시각적 측면에서 보자면 작품은 대나무처럼 반듯하게 선 지관(紙管)의 반복이다. 청각적 측면에서 보자면 어떤 이미지를 재현했다거나 일상의 구체적 소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까 시각성이 강조된 미술의 측면에서 이 작품은 공간설치에 가깝고, 청각성이 강조된 음악에서 보자면 자연과 일상의 상상력이 드러나는 구상음악(concrete music)에 가깝다. 이제 지하의 거친 공간은 평범한 공간(space)이 아니라 성스런 장소(place)가 된다. 작품을 통해 밋밋하고 추상적인 공간이 구체적인 이미지를 드러낸다. 그래서 이 작품은 각 장르의 확장이면서 동시에 장르의 확장을 통한 새로운 장르를 모색한 듯 보인다. 시각적인 재현을 벗어나 있고 고정된 화음을 깨부순다는 점에서 작품은 예술이 가질 수 있는 상상력의 끝간 데를 보여준다. 관객은 종이관에서 은은히 흘러나오는 소리가 그려주는 이미지를 바로 눈앞에 보여주는 사각 캔버스의 이미지보다 또렷하게 그려낼 수도 있을 테다.

물렁물렁한 상상력이 구체적인 개념보다 뚜렷하게 우리 머리를 깨치는 건 예술이 갖는 고유한 영역이다. 상상력은 그래서 우리의 오성보다 한 수 위에 있다. 현대미술은 이렇듯 장르간 혼융과 확장을 통해 소진된 몸에 활력의 에너지를 불어넣는지도 모르겠다.

 

정형탁 _ 독립큐레이터, 2009

’ Sound Forest'

Sound Forest

Han_Wonsuk